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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여신(女神)의 노래
나는 노래한다.
거짓으로 점철된 자들에게 노래한다.
독을 품은 채 달콤한 향기를 내뿜는 그 미소를 거두라고.
레크라인 왕궁 기사단 지원부대 소속 궁수 페이완은 재와 먼지와 썩어 들어가는 시체와 까마귀의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멋들어진 형상을 이루고 있는 웰페어 마을 주변 순찰을 위해 천막에서 나와 마을 외곽부터 살펴보기 위해 이제는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 부를 수 없는 '마을' 의 입구로 자신이 존경해 왔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녹색 빛 활과 지급품으로 받은 화살이 들어있는 화살 통을 매고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검과 창을 쓰는 자들은 부쩍 추워진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전투부대인 자신들이 왜 순찰까지 떠맡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식으로 투덜거렸는데, 이쪽이 본심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절대로 술과 고기와 따스한 온기가 있는 천막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고 계속 우겨댔고 결국 지원부대 소속인 궁수부대원들 중 한명인 자신이 차출 되었다는 것을 그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다른 궁수부대원들이 겨울바람에 얼굴이 얼어붙거나 배고픔에 쓰린 위를 참아가면서 잠들 필요가 없다는 걸 역시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거절할 수도 없었다.
페이완의 손에는 한 덩어리의 빵이 들려있었는데 그것은 오늘 밤 외곽 순찰을 돌 그의 몫의 절반이었다. 전투 중에 화살이 다 떨어진 페이완은 자신에게 주어진 배급량의 반을 동료 궁수에게 팔고 그 대가로 화살 30개를 얻을 수 있었다. 나라의 모든 걸 버리면서도 계속되는 전쟁 중이었기에 보급되는 화살이 늘 최상품은 아니었다. 어떤 건 앞쪽 반만 또 어떤 건 뒤쪽 반만 남아있는, 화살이라 부르기도 뭐한 것이었지만 아예 없어서 굶주린 야생늑대들에게 대항할 무기가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그는 군소리 하나 없이 바꾼 것이다.
추잡한 전쟁은 4년째 이어져오고 있다. 레크라인의 스물네 번째 왕인 첼트 레크라인 국왕이 이웃한 무튜릭 공국에 떨어진 '영생의 빛' 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오고 싶다는 허황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전쟁이었다. 레크라인 국왕이 선전포고를 하면서 처음 가졌던 망상과는 달리 소국에 불과하다고 여겨졌던 무튜릭 공국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버텨내고 있었다. 점차 국제무대에서 「전쟁광」으로 통하며 동시에 외톨이가 되어가고 있는 첼트 레크라인 국왕의 마음이 초조해 질수록 갖은 잔혹한 방법을 활용한 침공이 이어졌다. 결국 4년째에 접어들던 지난 달 무튜릭 공국의 수도와 가장 가까운 이곳 웰페어 마을 주변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수만의 병사들과 여러 명의 마법사를 잃어야만 했고 대가로 치룬 피해는 고스란히 본국의 일반 시민들에게 돌아가 나라 곳곳이 지금 이 마을의 상황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비참하다는 진언이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로 모든 정황은 설명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 조각나 버린, 과거 수도원이었다고 추측되는 건물을 막 지나쳐가려던 페이완의 발걸음이 멈췄다. 건물의 내부에서부터 그의 귓가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내뱉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밀려 들어왔다.
「허끅… 하아… 허끅… 하왁… 아… 아… 허끅… 끅… 끄으…」
오늘 낮에 이 곳으로 진군해 들어온 직후 기사단장과 병사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마법사 몇 명이 술과 고기로 성대한 파티를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한쪽에 떨어진 채로 모여 메마른 빵과 상한 듯 쾨쾨한 냄새를 풍기는 우유로 배를 채우고 있던 궁수부대원들 사이에서 페이완은 군량이 놓여진 기사단장 전용 막사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던 한 여자아이를 목격했다. 페이완은 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살해당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놀라움을 애써 감추며 그 여자아이가 무엇을 하려는지 지켜보았다. 여자아이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주머니에서 무뎌 보이는 단검을 꺼내들고 고기의 한쪽을 썰어내려고 했다. 쉽게 잘리지 않는 듯 소녀는 잠시 후 두 손에 단검을 쥐고 비스듬히 한 채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단검에 밀어 넣으려 하고 있었다. 여자아이도 페이완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사실 그 고기는 상당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고 얼핏 잘 받쳐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버팀목이 겨우 버틸 수 있을까 말까 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여자아이의 힘이 더해지면서 버팀목이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었던 것을 여자아이는 버팀목 한쪽이 빠각- 소리를 내면서 부숴 지는 그 순간에야 알아챌 수 있었고 그 소리는 아무도 기사단장의 막사 쪽에 무슨 일이 있는 지 신경 쓰지 않는 듯 떠들어대는 공터에 있는 모두의 시선을 쏠리게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였기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땅에 떨어지려는 고기 덩어리를 힘겹게 붙잡고 있는 여자아이에게 쏠렸다. 그리고 페이완은 고개를 돌려 소녀와의 시선을 피했다.
너희들의 말은 바람을 더럽히고
너희들의 발자국은 대지를 어지럽히며
너희들의 마음은 넓은 하늘마저 등을 돌리게 한다.
그러므로 나는 노래한다.
구역질나는 입으로 말하지 마라.
오물이 가득 묻은 그 발로 대지를 밟지 마라.
썩은 마음으로 하늘에 헛된 소망을 빌지 마라.
여자아이는 온 몸이 발가벗겨져 검은 재로 뒤덮인 땅 위에 높게 박힌 나무기둥에 묶였다. '병사들을 이끌며 항상 품위를 지키고 약자를 보호하는' 기사단장과 그를 따르는 부단장들은 온갖 욕스러운 단어를 내뱉으며 채찍으로 여자아이의 온 몸을 후려갈겼다. 참을 수 없는 아픔으로 터져 나오는 아이의 비명은 성욕에 목말라하던 기사단장과 부단장들을 광분하게 만들었고 시나브로 나무기둥이 여자아이의 피로 완전히 물들어갈 때쯤 어디서 구해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오랫동안 시뻘겋게 달궈진 것이 분명한 꼬챙이를 들고 와 여자아이의 팔과 다리를 마구잡이로 지져대었다. 그리고 그들이 침을 흘리며 광기의 외침을 토해낼 때 여자아이의 음부에 그 꼬챙이를 쑤셔 박았다.
페이완이 볼 수 있었던 건 거기까지였다.
그는 동료들의 함성으로부터 그리고 여자아이의 단말마로부터 달아나지 않는다면 미쳐버릴 것 같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달아나야만 했다. 마을 입구쪽으로 뛰쳐나가 무작정 달리던 페이완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역겨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부서진 건물의 한 귀퉁이에 주저앉아 온 몸을 떨어가면서 구토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위에서 나온 오물 같은 액체가 오히려 페이완에게 있어 그 순간만큼은 깨끗해 보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그에게 있어 분명한 사실처럼 느껴졌고 그럼에도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다시 한번 좌절감을 끌어안고 오물 같은 액체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자신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스스로에게 저주내리고 싶을 정도로 그의 온 몸은 흔들렸다.
수도원이었던 자리에 꿈쩍 하지 못하고 멈춰 서 있던 페이완은 자신이 여자아이가 터뜨리는 고통스런 목소리를 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지체 없이 잔해만 남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몇 걸음 내딛지도 않았는데 페이완은 자신의 눈앞에 죽은 지 하루나 이틀 쯤 된 것으로 보이는, 한 쪽 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비틀어진 성인 여성의 시체와 미처 눈을 감지 못한 채 자신의 바로 앞에서 온 몸을 비틀어가면서 신음하는 여자아이의 남동생처럼 보이는, 칼에 복부가 잘린 시체 두 구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낮에 보았던 여자아이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신음소리와 함께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페이완은 급히 자신의 호주머니와 늘 챙겨 다니는 전투용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만약 그 안에 응급약이나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여줄 수 있는 그 무엇이라도 있다면…
「홀로 존재할 가치가 있는 인간이여. 이미 늦었습니다. 그 여자아이는 이제… 구원받지 못합니다.」
페이완의 온 몸이 일순간 굳은 채로 전율했다. 여성의 목소리가 갑자기 등 뒤에서 날아온 것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분명 목소리는 등 뒤에서 날아와 그의 두 귀를 스쳐 지나갔는데 이미 자신의 눈앞에 약한 은빛이 감도는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모습을 한 여성이 여자아이의 몸 한가운데를 작지만 힘이 느껴지는 손으로 살짝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궁수부대의 일원으로서 움직이는 물체를 쫓는 것에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던 페이완 이었기에 그의 놀라움은 당연히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페이완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방금 전까지 온 몸을 비틀면서 괴로움에 휩쓸려 헤매던 여자아이의 떨림이 서서히 멈춰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아이가 가까스로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마주하면서 페이완은 눈물을 왈칵 쏟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입에서 어느 새 한 마디 말밖에는 나오지 않고 있었음을 눈물 탓이었을까, 페이완은 조금 뒤늦게 깨달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여자아이는 페이완을 향해 가까스로 미소 짓는 듯 보였다. 그리고는 마치 두 번 다시는 뜨지 않을 것처럼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페이완의 눈물이 오랜 시간동안 여자아이의 얼굴 위로 떨어진 후에 그는 겨우 고개를 들어 갑작스럽게 자신의 앞에 나타난 소녀를 의문에 휩싸인 얼굴로 바라보았다. 소녀는 분명 은빛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그 드레스는 투명해 보였고 그래서 소녀의 알몸은 페이완의 두 눈에 다 드러났다. 살짝 솟아오른 앙가슴과 유두 그리고 … 페이완은 차마 아래쪽을 바라볼 수 없었다.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이미 스무 해 넘게 보아왔었던 것일 텐데, 어째서 부끄러워하는 겁니까?」
은빛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한마디에 페이완은 슬픔 속에서도 소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얼굴로 일어나 소녀와 마주한 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페이완은 이 소녀가 혹시나 무튜릭 공국에서 보낸 고위 마법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빨리 화살을 활에 걸고 활시위를 잡아당기려던 페이완은 방금 전까지 눈앞에 있던 소녀가 보이지 않는 것에 당황했다. 보통의 병사라면 그렇게 빨리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그렇게 했고 페이완은 자신의 앞에 있었던 은빛 드레스의 소녀가 적국의 고위 마법사일 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소녀는 이미 페이완의 사고를 읽고 있었다는 듯 드레스를 벗어 페이완의 앞에 던졌다. 은빛의 드레스는 소녀의 몸을 벗어나 다음 순간 하늘로 날아올랐다. 드레스의 작은 조각 하나 하나가 별이 되어 하늘에 새겨지는 모습을 본 페이완은 자신이 어렸을 때 들었던 짧은 구전설화를 떠올려 냈다. 그리고 페이완은 활을 떨어뜨린 채 나체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소녀에게 엎드렸다.
나의 몸은 죽은 자들의 안식처.
슬픔에 잠긴 이들의 마지막 희망.
거짓된 빛에 눈이 먼 이들이 찾아오는 절망의 구렁텅이.
그대는 곧 죽을 자인가? 슬픔에 잠겨 쓰러질 자인가?
아니면 거짓에 눈이 멀어 암흑의 불구덩이에 스스로 몸을 맡기는 자인가?
그렇지 않다면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노래한다.
나에게서 무엇을 얻으려 하지 마라.
나는 노래한다.
나를 찾아오는 모든 헛되고 어리석은 생명이여.
나에게 무엇을 바라거든 그에 알맞은 행동을 했음을 나에게 증명하라고.
「나의 이름은 어둠. 페이완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이여. 당신이 가진 최후의 진심으로 인해 이 어린 여자아이는 평안하게 잠들었습니다. 당신이 가진 진심을 나는 가져가고 그 대가로 이 어린 여자아이를 평안하게 그녀의 부모와 동생이 있는 곳으로 돌려보내었습니다. 이제 그대가 날 위해 한 가지 약속을 해 주어야 합니다.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페이완은 자신의 온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붙들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머리 위에서 그나마 옅은 빛을 내려주던 손톱달도 그 모습을 감추었고 무언가를 찾듯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긴 잠에 빠진 여자아이도 자신의 앞에 서 있던 소녀도 찾을 수 없었다. 온통 검은 빛으로 뒤덮여 자신의 손도 발도 몸도 보이지 않았고 만져지지도 않았다. 공포에 사로잡히려는 순간 페이완은 차갑고도 차갑지 않은, 여성의 것으로 느껴지는 손이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그 마음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 마을에서 당장 떠나십시오. 혼자 떠나야 합니다. 결코 그 누구에게도 지금 겪은 일들을 얘기하면 안 됩니다. 당신들의 왕이 가지려고 하는 것은 빛이 아니라 허황된 저주일 뿐입니다. 열어서는 안 될 상자를 열어버린 무튜릭 공국은 곧 무너질 겁니다. 그리고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당신들도 곧 같은 운명에 놓이고 말 것입니다. 제 말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이 제가 페이완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이 가진 진심을 산 대가로 당신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전부입니다.」
「자…잠깐만요. 당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만…」
페이완은 미처 말을 다 끝낼 수가 없었다. 눈앞이 잠시 밝아지는 듯 했다가 다시 어두워졌고 자신의 눈에 혹은 몸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닐까 의심한 페이완은 재빨리 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자 수도원이었다고 추측되는 건물에 가만히 서 있는 자기 자신이 가는 달빛에 드러나 있었다. 페이완은 자신이 혼자 그 장소에 있음을 알았다.
진심으로 나는 노래한다.
빛이 너희들에게 알려준 것은 그따위 거짓이 아니었다고.
너희들이 만들어낸 거짓에 너희들이 스스로 빛을 뒤집어씌우고
너희들의 왕으로 삼았을 뿐이라고.
빛은 결코 너희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을 것이며
빛은 오히려 너희들을 흔적하나 없이 태워 버릴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노래한다.
나를 찾아 도망쳐 오는 자들은 내가 직접 너희들의 목숨을 거둬 갈 것이라고.
페이완의 발 앞에는 평온히 얼굴을 한 여자아이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더없이 깊은 잠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대가 보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 믿을 자신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진실이 그대를 배신해도 믿을 용기는 있습니까?
「빨리 빨리 움직여! 오늘 오후에 더럽게 빌어먹을 적국의 수도로 전 군대를 집결시켜 한번에 무너뜨릴 거다. 너희들도 내 말을 잘 따라야 한다! 왜냐?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움직여야 전리품을 더 많이 챙길 수 있단 말이다. 거기, 빨리 뛰어! 어기적거리면서 걷지 말고! … 근데 저 자식은 아까부터 멍하니 뭐하고 있는 거야? 이봐. (옆을 지나가던 철갑기사에게) 저쪽에 멀뚱히 서서 정신 줄 놓은 병신은 누군가?」
「아… 아마 어제 밤에 외곽 순찰을 돌았던 녀석일 겁니다. 어벙한데다가 순진해서 궁수 부대에서 바보 취급 받는 녀석이지요. 간단하게 잘 속아 넘어가는 병신입니다.」
「…그래? 그럼 저 놈을 미끼로 우리 애들의 광기를 좀 끌어올려야겠군. 저 녀석을 불러오게나.」
페이완은 자신에 대해 온갖 억측과 비아냥거림이 섞인 얘기가 오고 가는 것도 모른 채 무튜릭 공국 수도로의 진군을 위한 기사들의 갑옷 입혀주기와 온갖 짐 꾸리기를 하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시뻘건 태양만 쏟아지는 하늘 위에 암흑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새 한마리가 주위를 배회하는 것을 방금 전 목격했던 페이완은 어젯밤의 일과 소녀의 경고가 떠올라 불길함에 휩싸인 채 어느새 새가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늦게 외곽 순찰을 마치고 두어 시간동안 짧은 잠을 잘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페이완은 결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어제 밤에 만난 소녀의 말과 모습과 결국 어떻게 해 주지 못한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페이완은 야영천막에서 몰래 빠져나와 수도원이었다고 추측한, 완전히 부서져버린 건물 안에 고이 잠든 여자아이와 그녀의 남동생 둘과 그녀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인물까지 마을 한편의 공터에 땅을 파고 묻어주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자신에게 주어진 두 시간하고도 삼십분을 더 써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아침 점호에 늦었고 선임 궁병 들에게 온몸을 짓밟히고 주먹으로 얻어맞는 '사소한' 일을 겪어야 했지만 그것까지 페이완은 자신이 어제 여자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일련의 대가라고 받아들였다.
「이봐. 거기 멍하니 서 있는 병신. 기사단장님이 찾으신다. 얼른 뛰어가 봐.」
「예? …예! 알겠습니다!」
페이완은 자신이 들고 가던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기사단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최고급 가죽으로 만들어진 거대 천막을 향해 달려갔다. 허둥거리며 달려가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레크라인의 한 철검기사는 피식- 소리를 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멍청한 녀석. …네 녀석을 보고 있으면 우리 마을에 사는, 정신 줄 놓은 바보가 생각난단 말이다. 쳇. 괜히 씁쓸해지네.」
「…네? 제가 여기에 남아서 죽은 마을 사람들 모두를 묻고 따라오라는 말이십니까?」
뜻밖의 명령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페이완에게 기사단장은 마시고 있던 찻물을 끼얹었다. 부단장들은 이미 기사단장으로부터 '얼빠진 녀석 하나를 이용해 자신들을 향한 불만을 잠재우고 그들의 광기를 끌어내는 아름답고 멋진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터라 기사단장의 노여움 가득 담긴 신음소리에 발맞춰 페이완을 둘러싸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부단장들의 '얼빠진 녀석 짓밟기'로 인해 자신의 전용 막사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게 만들어 병사들의 주위를 끄는데 성공한 기사단장은 자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다가 갑작스런 화상으로 얼굴을 만지며 괴로워하는 궁수부대의 일원에게 계획 세운 대로 크게 고함을 질렀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이 놈이 지금 내게 뭐라고 지껄이는 건가? 이곳 마을 사람들이 불쌍하니까 한데 모아서 묻어주고 가겠다고? 허허. 완전히 정신을 놓고 다니는구나. 어떻게 이런 정신 나간 놈을 궁수부대에 놔 둘 수가 있을까!」
기사단장의 고함소리가 꽤 컸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궁수부대를 이끄는 궁수부대장이 화난 얼굴로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페이완은 반쯤 감긴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다. 궁수부대장의 주먹이 얼굴을 후려치려는 듯 날아 들어왔고 그 주먹은 화상을 입어 비틀거리고 있던 페이완의 눈을 정통으로 가격하였다.
그대가 듣는 말이 진실이라 믿을 자신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말이 그대를 상처 입혀도 믿을 용기는 있습니까?
페이완은 자신의 비명소리와 함께 세상의 반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느낌은 땅바닥을 바라보았을 때 어디에선가 아래로 흘러내리는 핏물을 목격하였을 때 더욱 확실해졌다.
「궁수부대장에게 명한다. 나는 저 정신 나간 놈을 우리 자랑스런 레크라인 군대에 도저히 놔 둘 수가 없다. 고로 자네의 권한으로 저 녀석의 궁수부대원 자격을 박탈할 것과 위계질서를 어지럽힌 죄로 50대의 매질을 가할 것을 명한다. 지금 즉시 시행하라!」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밖에 있는 경계병은 뭘 하는가. 당장 이 정신 나간 녀석을 당장 끌어내고 매질 할 준비를 하라!」
그대 마음에 있는 의지가 진실이라고 믿을 자신이 있습니까?
그 의지가 비열함을 드러내도 믿을 용기는 있습니까?
그 뒤로 흘러간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이 페이완에게는 마치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평생의 악몽처럼 다가왔다. 천막에서 끌려나온 페이완은 주둔지 한 가운데에 만들어진 반듯한 공터에서 천막을 세울 때 썼던 굵은 나무 몽둥이로 군대 안에서 가장 힘이 센 두 병사에게 50대 하고도 세 번 더 50대를 맞아야 했다. 소문은 군대 안에 순식간에 퍼졌다. 병사들이 모여들었고 모두들 즐거운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깔깔대고 그를 조롱하면서 떠들어대었다. 조롱이 지나간 다음 페이완이 입고 있던 궁병 옷을 몇 명의 창병들이 달라붙어 찢고 침을 뱉고 흙을 뿌려 (덧붙여 뺨도 간간히 때리면서) 마치 기어 다니는 땅거지가 입고 뒹굴었던 것처럼 만들었고 마지막으로 페이완의 양 팔을 붙잡아 꼼짝 못하게 만들어 놓은 뒤 그가 자신의 생명처럼 아끼던 녹색 빛 활을 눈앞에서 꺾어버렸다. 그리고 나서야 겨우 풀어주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주둔지 밖으로 내쳤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바로 어제까지 같이 생활하며 목숨을 함께 하던 동료를 그들은 아주 간단하게 내버려두고 무튜릭 공국의 수도를 향해 달려가 버렸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 지 알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온 몸을 지배하던 고통이 그나마 조금 가라앉은 뒤에야 페이완은 힘겹게 한쪽 눈을 뜬 채 절룩거리면서 목표 없이 걷기 시작했다.
「…내가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되어야 하는 거지? ……」
페이완은 몇 번이고 쓰러졌다 다시 일어났다. 아직 그는 자신이 레크라인 군대에서 낙오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그의 한쪽 눈은 계속 말의 발자국을 찾아 먼지만 흩날리는 회색빛 땅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폐한 공간을 떠도는 바람이 한번 불어와 그를 쓰러뜨릴 때마다 페이완은 겨우 자리 잡히던 자신의 시선이 또다시 어그러지고 동시에 세상이 점점 희뿌옇게 변해지고 있다는 것을 꽤 오랜 시간이 흘러 시뻘건 태양이 마지막 빛을 잃어 갈 때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힘겨움에 지쳐 페이완은 쓰러지듯 반쯤 주저앉아 버렸다. 그 곳은 새벽에 여자아이를 묻어준 자리였다.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 단지 …잠이 오질 않아서 밖에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옆에 있던 동료에게 한마디 했을 뿐이야. 그런데 왜…」
「…그 동료가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 당신의 뒤를 쫓아갔을 거라고는 생각하질 않는 군요, 페이완. 결국 이렇게 버려지고 나서야 무언가를 깨닫는 건 현명하지 않은 행동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나와의 약속만큼은 지켜주었습니다. …고마워요.」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온 어제 밤의 그 목소리에 페이완은 마치 온 몸에 소름이 돋아 오른 듯 부들거리면서 그리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울부짖었다. 마치 그렇게라도 해야 지금에야 받아들일 수 있는 울분과 분노를 조금이라도 표출할 수 있을 것처럼.
한 동안의 울부짖음이 지나고 다시 흙바닥 위에 쓰려져 시야를 완전히 잃어가던 페이완은 누군가 자신을 반쯤 일으켜 앉히고 잠시 후 등 뒤에서 껴안아주는 느낌을 받았다. 차가워진 자신의 등에서 볼록하고 둥그스름하며 따뜻한 무엇인가가 느껴졌을 땐 순간 움찔했지만 페이완은 서서히 자신이 그녀가 가진 따스함과 하나가 되어 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대가 가진 바람이 진실한 것이라고 믿을 자신이 있습니까?
그 바람이 이뤄지지 않을 때에도 믿을 용기는 있습니까?
「이 보잘 것 없는 자의 부탁을 들어주었기에 페이완 …당신 혼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이 곳을 바로 떠나지 않아 지금과 같은 아픔을 맛보고 난 뒤에서야 깨달은 진짜 세상의 단면에 울부짖는 당신의 마음도 저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도 깨달았듯 당신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약하고 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페이완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만큼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페이완에게는 자신을 누구보다 믿어주는 아버지가 있었고 늘 따듯하게 바라봐주는 어머니가 있었으며 자신보다 일곱 살 어린 귀여운 동생도 있었다. 자신의 가족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고향 마을에서 하루 빨리 전쟁이 끝나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이처럼 울부짖어야 한다는 것도 비참하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 저와 함께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부터 당신과 같은 사람이 나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절 따라가겠다고 말해주십시오. 원하지 않는다면 따라오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던 저는 당신의 양심을 가진 대가로 제게 주어진 시간동안 당신을 지켜드릴 것입니다. 물론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그리고 대답을 들을 때까지 전 여기서, 당신의 등 뒤에서 이 모습 그대로 기다리겠습니다."
이제 완전히 시야를 잃어버린 페이완은 이 모습을 보게 될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돌아올 때까지 매일 해가 저무는 언덕에서 기다리겠다는 어머니의 말을 생각해냈다.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몸 건강히 잘 갔다 오라는 무뚝뚝한 말이었지만 떠나는 날 아침 햇살에 비쳐 보인 아버지의 눈에 맺힌 눈물을 못 볼 정도로 시력이 나쁘지는 않았다. 늘 오빠 같은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여동생도 생각했다. 군에 입대하겠다고 했을 때 입대 취소하지 않으면 지붕에 올라가 뛰어내리겠다고 나름 협박까지 하던 귀염둥이 동생의 모습이 마음에 그려져 깊게 새겨졌다. 그리고 자신이 지켜주지 못하여 지금 자신의 발 앞에 잠든 소녀의 얼굴과 동생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대가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습니까?
모두가 그대의 존재를 부정해도 스스로 존재 한다 믿을 용기는 있습니까?
「…… …… 따라가겠습니다. 다만…」
어둠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소녀는 페이완의 목소리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미약하게나마 어떤 결심이 깃들여 있음을 소녀는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소녀는 페이완의 앞으로 몸을 움직여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인지 핏물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뜨거운 그 무언가가 흘러 작은 무덤 앞에 선명한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페이완의 결심이 그 곳에 새겨지고 있었다.
「…… 제가 원할 때마다 가족들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부탁… 드립니다.」
소녀는 그의 말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그것이 이 남자의 마음에 남은 짐이었던 것일까.'
「예. 제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에는 언제든지 만나셔도 좋습니다. …그럼.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지금부터 페이완. 당신은 저를 지켜주는 기사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대가 본 아픔, 그대가 만난 고통, 그대가 겪었던 절망이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영원한 시간을 헤매며 완전한 결말에 다다를 때까지 돌아다닐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장소가 완전한 결말을 향한 시작입니다.」
… (전략) 레크라인 왕국과 무튜릭 공국 간의 4년간에 걸쳤던 길고 긴 전쟁의 마지막처럼 잔인하고 화려하며 지금까지 수많은 역사학자들의 논쟁거리로 삼을 만한 소재는 찾아볼 수 없으며 앞으로 일어나기도 힘들 것이다. 첼트 레크라인 국왕의 출전으로 이뤄진 무튜릭 공국 수도 진군 시도는 무튜릭 공국 병사들의 목숨을 건 기백으로도 막아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튜릭 공국 수도를 지탱하던 성벽이 막 무너지던 순간 (생존자였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무튜릭 공국의 궁성에서부터 알 수 없는 새하얀 빛이 모든 것을 뚫고 빠져나와 큰 반구를 이루고 그 직후 폭발하여 레크라인 군대를 총지휘하던 첼트 레크라인 국왕과 무튜릭 공국의 국왕 세프릅 무튜릭 2세 그리고 50만에 이르는 레크라인의 군대와 무튜릭 공국의 수도를 지키던 수만의 병사와 시민들이 그야말로 산산 조각나고 태워져 흔적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전해져온다. … (중략) … 일각에서는 레크라인 국왕이 그토록 빼앗기를 원했던 '영생의 빛'이 폭발하여 그리 된 것이라 하고 어떤 이들은 애초에 '영생의 빛'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무튜릭 공국에서 개발해오던 비밀 마법무기를 사용하다가 문제가 생겨 그리 된 것이라 하기도 하지만 원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과가 중요한 것이기에 수십만의 목숨과 두 국가가 일순간 산산이 부서져 이제는 그 흔적을 찾으려 해도 기록만으로 겨우 존재하는 과거의 두 국가의 마지막 전쟁에 대한 논의는 그 논의 자체에 의의가 있기 보다는 인간의 헛된 욕망이 어떤 결과를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가장 확실한 교훈이라는 것을 두 국가를 이어받아 이 아름다운 대륙에 새롭게 세워진 필레시아 제국의 한 사람으로서 주장하고자 하는 데 저 거대한 전쟁의 마지막만큼 좋은 사례는 없다 할 것이다. (후략) …
-필레시아 제국 제 1의회 소속 역사기록관 총장 체일 데스티니가 기록한 글에서 발췌-
한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나이를 먹지 않는 저주에 걸려 있었다.
모습은 그 나이 또래들과 발을 맞춰 앞으로 나아가듯 비슷해져가는 것으로 보였지만
소년의 나이는 자신의 존재를 처음으로 자각한 나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많은 과학자들과 시인들과 점술가들과 거짓부렁 쟁이 들이 그 소년을 만나러 먼 길을
걸어 소년이 사는 마을로 찾아와 소년의 몸을 검사하고 매만지고 찬양하고 조롱하며
다시 그들이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소년은 외로웠다.
나무도 풀도 바람도 사람들도 자신에게 모두들 잘 해 주었지만
소년은 외로움에 빠져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저주를 풀어 줄 조력자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높은 산의 거인도, 연못의 여왕도, 동물들의 제왕도
그리고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도 그 소년의 저주를 풀어줄 수 없었다.
소년은 왜 자신만이 외로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년은 점차 마음이 삐뚤어져 갔다.
다른 사람들과 동물들과 꽃들과 그 외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년은 저주를 풀지 않는 대신
자신이 걸린 저주를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기로 마음먹었다.
소년은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 둘 씩 잘라 작은 종이상자에 넣고 정성스럽게 포장했다.
소년은 그렇게 만들어진 수많은 종이상자에 도착할 주소와 이름을 일일이 적어
별들의 쉼터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인간들이 불을 내서
소년의 우편물을 배달해 줄 별들이 남아있지 없었다.
소년은 자신이 직접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만든 종이상자를
모두에게 보내는 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한 소녀를 만났다.
굳게 닫힌 입술과 무표정한 얼굴, 생기가 없는 두 눈은
마치 살아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소녀가 다른 사람들과 나무와 동물들을 만나러 돌아다닐 때마다
모두 차갑게 등을 돌려 달아난다는 사실이었다.
소년은 소녀를 찾아가 물었다.
「어째서 사람들은 네가 다가가는 것을 싫어하는 거니?」
소녀는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러는 네가 다가갈 때 왜 몇몇 사람들은 널 똑바로 쳐다보려 하질 않지?」
소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소녀가 알고 있다는 것에 당황했다.
어쩌면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스스로 부정하려 했었다는 것을
소녀가 일깨워 준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을 지도 모른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그런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입을 열어 말했다.
「너, 저주에 걸려있구나? 그 저주, 내가 풀어줄까?」
소년은 소녀가 자신의 저주를 풀어줄 수 있다는 것에 더욱 놀라워하며 말했다.
「넌 혹시 내가 저주에 걸린 이유를 아니?」
「응. 그건 날 가두기 위해서였어. 넌 날 지배하기 위해 태어난 거야.」
소녀는 입을 떡하니 벌린 소년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한쪽 팔을 떼어냈다.
다른 한쪽 팔로 방금 떼어낸 팔을 붙잡자, 그 팔은 새하얀 검이 되었다.
소녀는 소년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소년은 세로로 양분되어 소녀의 앞에 쓰러졌다.
소년은 잠시 동안 커다랗게 떠진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잘라진 입으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녀는 소년의 두 눈을 자신의 한쪽 팔로 감으면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의 저주는 풀렸어.
내가 잠들면 넌 다시 일어나 사람들과 나무와 풀과 동물들을 만날 수 있을 거야.」
「……」
「그때까지… 좋은 꿈꾸길 바랄게.」
소녀는 소년의 몸이 서서히 녹아가는 것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소년이 걸어왔던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소녀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소년이 돌리려 했던 종이상자를 찾아내어,
그 상자를 열기 전에 모두 회수해야 하는 일이.
소년의 이름은 빛, 소녀의 이름은 어둠 이었다.
-『잊혀진 어느 나라에서 구전되어 왔다고 알려진 설화 모음집』에서 발췌-
2010. 2. 9. Fin.
(한글 2002 / 휴먼모음T / 10pt / 15,159자)
** 네이버 타 카페에 올렸던 글을 약간 손봐서 올립니다. 최초작성일이 좀 오래전이라 글이 맘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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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군요.
빛과 어둠이란 소재는 판타지에서 자주 쓰이던 재료죠.
글의 끝맺음은 여운이 길게 남아 단편이라기 보다는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프롤로그 느낌도 드네요.
PS) 글의 초반부에서 문장이 길어져서 만연체인가 싶었는데 맞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