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stepaper_Happy Ending

조회 수 2291 추천 수 1 2010.05.12 09:37:20
 

Happy Ending



한 사람이 있었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소유자라 할 만한 사람이지. 본인의 잘못인지, 부모의 죄가 깊은 것인지, 혹은 그저 신의 장난기가 동한 탓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 하기야 이런 운명에 이유 따위야 무슨 상관일까만. 그렇지 않은가? 아직 그의 운명을 알려 주지 않았다고 재촉하지 말게. 그의 운명은 결코 변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는 태어나면서 바로 어머니를 잃었네. 그를 낳다가 그만 그의 어머니가 숨을 거두었거든. 그의 아버지는 크게 상심했지만 아들을 정성껏 키웠어. 그러나 아버지마저 그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뜨고 말았지. 그 후 노구의 할머니가 그를 키웠어. 하지만 그것도 채 1년을 가지 못하고 이번에는 신전에 맡겨졌지. 그는 드니브의 신전에서 생활하게 되었어. 그러나 신전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전쟁이 터지면서 국경 근처에 있던 신전에 적군이 쳐들어와 신관들을 도륙하고 재물을 약탈해 갔네. 딱히 훔쳐갈 만한 것도 없는 가난한 신전이었는데 말이야.

그는 살아남은 다른 수련생들과 함께 한 영지로 달아났네. 후덕한 영주가 그들을 거두었고, 특히 영특했던 그를 아껴 가까이에 두고 아들처럼 보살폈네. 게다가 그는 외모도 준수하고 성품이 좋았어. 영주는 무남독녀로 소중히 키운 딸이 그를 좋게 생각하는 것을 눈치 채고 큰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혼인시키기로 결심했지. 드디어 그의 삶이 음지에서 양지로 바뀌는 순간이었어. 그런데 운명도, 신도 끝내 그의 편은 아니었던지, 결혼식 전날 밤 끔찍한 일이 벌어졌네. 아리따운 신부가 그만 살해당하고 만 거야 - 글쎄, 그녀를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영주의 근위 기사 하나가 그녀가 출신도 모르는 비천한 자와 혼인을 올린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져 술김에 그런 짓을 저지른 게지. 성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어졌네. 기쁨의 웃음이 넘치던 곳에서 순식간에 애통의 울음이 터져 나왔지. 영주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에 목 놓아 울었네. 남자는 영주에게 자신의 죄를 고했어. 자식을 잃은 고통 속에서도 올곧은 사람인 영주는 이 비극은 결코 그의 잘못이 아니라며, 오히려 그를 위로했어. 하지만 그의 고백은 충격적인 것이었지.

나를 가장 사랑한 어머니가 자신을 낳다가 죽었고 나는 살아남았으며, 이후 나를 사랑해 준 아버지가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 갑자기 지붕이 무너지는 뜻밖의 사고로 죽었고 나는 살아남았으며, 이후 나를 사랑으로 키워 준 할머니가 갑작스레 전염병으로 죽었으며 나는 살아남았고, 고아가 된 나를 맡아 사랑으로 훈육해 준 신관들이 전쟁 통에 모두 죽었으며 나는 살아남았고, 이후 황송하게도 사랑으로 나를 받아 준 영주의 딸이 죽었으며 나는 살아남았다.

영주는 놀란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네. 그저 불쌍한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굴곡진 삶이었으니 말이야. 남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고 말했어. 영주는 그의 말을 곧바로 믿지 않았지. 그러나 남자는 자신은 평생 사랑받을 수 없는 운명임을 알고 있다고 말했지. 그리고 다시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않겠노라고 말하고 그곳을 떠났어.


한 사람이 있었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소유자라 할 만한 사람이지. 본인의 잘못인지, 부모의 죄가 깊은 것인지, 혹은 그저 신의 장난기가 동한 탓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 하기야 이런 운명에 이유 따위야 무슨 상관일까만. 그렇지 않은가? 아직 그녀의 운명을 알려 주지 않았다고 재촉하지 말게. 그녀의 운명은 결코 변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녀는 일곱 살이 되던 해 한날 한 시에 부모님을 여의었네. 자신의 생일날 부모에게 예쁜 옷과 신발을 받고 기뻐하며 부모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인 바로 다음 날, 싸늘하게 식은 엄마, 아빠의 주검을 발견하게 되다니 너무도 끔찍한 일 아닌가. 부모가 죽은 후 아이는 먼 친척 집에 맡겨졌네. 하지만 양부모들은 그리 상냥한 사람들이 아니었어. 어쩌다 떠맡은 아이를 그다지 예뻐하지 않고 구박했지. 그런 소녀를 챙겨준 건 그 집의 딸이었어. 소녀보다 세 살 많은 딸은 마치 친동생을 보살피듯 소녀를 아꼈지. 덕분에 그녀는 힘든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어. 그래서 소녀는 딸의 12번 째 생일이 다가오자 그녀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수중에 가진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아이가 무얼 줄 수 있겠나. 결국 소녀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부모의 유품을 팔아 예쁜 장신구를 사기로 했지. 소녀는 자신이 산 장신구를 품에 품고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네. 선물을 받은 친척 언니는 뛸 듯이 기뻐했어. 그 모습을 본 소녀도 무척이나 행복했고.

다들 뭔가 예상하고 있는 듯하군. 그래, 다음 날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다가 사고를 당하고 말았네. 딸이 못된 귀족놈의 마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은 걸세.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지. 집안은 하루아침에 초상집이 되었어. 게다가 이 끔찍한 사고의 원인으로 소녀가 지목되었지. 딸아이가 소녀에게 선물을 받고는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느라 생일도 못 챙긴 소녀가 안쓰럽다며 늦었지만 선물을 사주고 싶다고 아이를 데리고 길을 나섰던 거야. 죽은 아이의 부모는 딸의 죽음이 소녀의 탓이라며 그녀를 핍박했어. 가뜩이나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힘들어 하던 소녀에게 이는 큰 충격이었어. 결국 소녀는 그 집을 나와 고아원으로 가게 됐지.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보다 어린 아이들을 돌보며 지냈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가 돌보는 아이들이 하나 둘 죽어나갔어. 고아원 사람들은 도무지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지. 그녀는 아이들에게 해코지를 하기는커녕 정말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돌보았기 때문이야. 하지만 소녀의 손이 닿는 아이들은 병으로, 사고로 계속 죽고 말았지.

결국 몇 년 뒤 그녀는 고아원마저 떠나 한 귀족 가문의 노부인을 모시는 일을 하게 되었어. 몸이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그 외에는 큰 부족함이 없는 지라 노부인은 성격이 온화하고 사려가 깊었어. 그녀는 성심껏 귀부인을 보살폈지. 소녀는 어느새 훌쩍 자라 제법 고운 처녀가 되었어. 가문의 식솔 등 중에서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일체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친구도 없었지. 그저 묵묵히 노부인만 모실 뿐이었어.

그러던 어느 날, 노부인의 손자가 할머니를 찾아왔어. 젊고 잘 생긴 청년의 방문에 온 집안이 활기를 찾았지. 노부인마저 몸이 한결 좋아지는 듯했지. 그리고 얼마 안 가 사건이 터졌지. 손자가 하인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가 그만 맹수의 습격을 받은 거야. 하인들이 급히 그를 집으로 데려왔지. 놀란 노부인은 여자에게 그를 간호하라고 시켰어. 그녀는 손자의 식사를 챙겨주고 붕대를 갈아주고 책을 읽어주거나 대화 상대가 되어 주곤 했어. 덕분에 손자는 지루한 병상 생활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지. 마침내 손자는 회복이 되었고 할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본가로 돌아가기로 했어. 그런데 손자가 떠난 다음 날 노부인의 집에 끔찍한 소식이 전해졌어. 손자가 돌아가는 길에 산적을 만나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었지. 놀란 노부인은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말았어. 한참 후 노부인은 겨우 정신을 차렸어. 그리고 여자는 울면서 자신의 죄를 고했어. 노부인은 모슨 일인 지 몰라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지. 그녀의 고백은 충격적인 것이었어.

내가 사랑하는 부모는 어느 날 밤 강도의 칼에 무참히 죽고 나만 살아남았으며, 이후 내가 친언니처럼 사랑한 친척 언니가 마차에 치여 죽었고 같이 있던 나는 살아남았으며, 이후 고아원에서 자신이 동생처럼 사랑한 아이들이 하나 둘 죽었으며 자신은 살아남았고, 감히 비천한 신분을 망각하고 노부인의 손자를 사모하여 그를 죽였다.

노부인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 여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고 말했어. 노부인은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지. 하지만 여자는 자신은 결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운명임을 알고 있다고 말했지. 그리고 다시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노라고 말하고 그곳을 떠났어.


남자는 도시를 떠나 깊은 산 속 작은 나무집에 머물렀어. 인적이 드문 곳이었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어. 그저 푸른 안개와 시원한 바람, 반짝이는 별만이 그를 사랑했지.

 

여자는 도시를 떠나 깊은 산 속 작은 나무집에 머물렀어. 인적이 드문 곳이었고, 그녀가 사랑할 사람은 없었어. 그저 푸른 안개와 시원한 바람, 반짝이는 별만이 그녀의 사랑이었지.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날, 남자는 여자를 만났어.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말했지. “안녕히 가세요.”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날, 여자는 남자를 만났어.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말했지. “잘 지내셨나요?”

서늘한 바람이 부는 날, 남자는 여자를 만났어. 빨간 낙엽이 떨어지는 나무 아래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말했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죽어요.”

차가운 바람이 부는 날, 여자는 남자를 만났어. 빨간 낙엽이 쌓인 나무 아래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말했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죽어요.”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던 날, 남자가 여자를 만났지. 여자가 말했어. “당신과 나, 누가 더 불행한 걸까요?”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말했지. “사랑합니다.”

여자는 죽었어.

남자는 죽었어.




비류

2010.05.13 12:28:39
*.71.172.89

좋은 글 잘봤습니다. //-//

 

인간을 구원하는 건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에 사랑하는 이를 만났으니 죽더라도 행복할거라고 생각합니다.

Bomberic Angel

2010.05.13 21:56:02
*.200.3.11

이미지 하나가 떠오르네요.

어렸을때 삼촌이 빌려온 무협만화를 본적이 있었어요.

단추를 누르면 양쪽 끝으로 칼날이 튀어나오는 단봉을 사이에 두고

서로 껴안은채 죽은 노인과 젊은이가 기억나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서로 죽고 죽일수 밖에 없는 상황 같은데

 둘이 죽어서 양쪽 진영이 전쟁을 그만두던가 그런 내용으로 기억해요.

그 둘은 웃으면서 기꺼이 그리하였지요.

 

슈휀님 글 속의 두 남녀도 그랬을거라 생각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했지만

자기혐오가 극에 달해 있었겠지요.

그래서 죽음에 뛰어들고자 하는 사람을 어떻게 막을수 있겠어요.

 

랭커역설

2010.06.05 13:17:38
*.14.249.50

사랑이나 행복보다는 자기혐오나 자기파괴가 느껴져서 더 무시무시한 사랑고백...

아 늦게 봤다;


Bomberic Angel님의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자기혐오가 극에 달해...]에 동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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